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산함 사건 (문단 편집) === 3.20 정변 === 위에서 봤듯이, 중산함의 출항은 오해로 빚어진 단순 사고로 보였다. 그런데 이때 장제스의 주변에는 매우 정황이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6년 3월 18일 아침,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장제스의 집에 두시간 동안 다섯 차례나 전화하여 장제스의 일정에 대해 물은 일이 발생했다. 전화가 왔을 때 장제스는 부재 중이어서 장제스의 아내 천제루가 전화를 받았다. 천비쥔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전화했다고 하면서 장제스가 언제 황푸로 가는지, 어느 부두로 가는지를 물었다. 천비쥔은 매우 부유한 상속녀로 도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장제스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해서 장제스에게 적대적인 회고록을 남긴 천제루조차도 그날 천비쥔의 전화는 매우 수상했다는 회고를 하고 있다. 장제스가 집으로 돌아오자 천제루는 황포군관학교에 가는 시간을 늦추라고 했다. 이에 장제스가 황포군관학교에 전화를 걸자 중산함이 황푸 섬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3월 18일에서 3월 19일로 넘어가는 자정, 공산당원 후궁몐이 찾아와 장제스와 긴급한 대화를 나누었다. 3월 19일 아침이 되자 다시 정체불명의 전화가 장제스의 행방을 추궁했고 장제스는 급히 집을 뛰쳐나갔다. 그 사이에 교도주임 덩옌다가 초조한 모습으로 장제스의 집을 방문했다. 천리푸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는 장제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마치 그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사전에 알고 있는 듯했다. 장제스가 돌아온 뒤인 오전 10시, 리즈룽이 전화 상으로 전날 밤 황푸에 파견한 중산함을 돌아오게 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리즈룽: 중산함을 광저우로 되돌려 참관단에 참관시키고 싶은데, 좋겠습니까? >장제스: 중산함은 언제 황푸에 갔는가? >리즈룽: 어젯밤입니다. >장제스: 나는 황푸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자네가 광저우에 회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 나에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리즈룽: 중산함을 회항시킨 것은 교장의 명령입니다. >장제스: 그 명령문을 가져와보라. >리즈룽: 그것은 전화에 의한 명령이었습니다. 저녁 6시가 되어 중산함은 광저우로 돌아가긴 했으나 군함의 증기를 끊지도 않고 무기도 전투대형으로 배치해 놓았다. 장제스는 이 시점에서 자신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호문요새 사령이자 장제스의 측근인 진조영의 증언에 따르면, 장제스는 처음에는 산터우로 달아나 재기를 꾀하기로 하고 산터우로 가는 배표를 구입하여 자동차를 타고 부두로 가다가 마음을 바꿔서 광저우 시내로 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장제스의 행방을 묻는 전화가 사방에서 쏟아졌는데 그 중에는 또 천비쥔이 있었다. 천리푸의 회고에 따르면, 세번째로 전화했을 때도 장제스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천비쥔은 천리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전화를 세게 끊어버렸다고 한다. 장제스는 광저우로 달려가 해군학교 부교장이자 쑨원주의학회 회원 어우양거(歐陽格)에게 함대사령 권한을 부여하여 중산함을 진압하고 리즈룽을 구속, 심문할 것을 지시했다. 저녁 7시, 어우양거가 파병한 위병들이 리즈룽의 집으로 찾아가 왜 중산함이 여전히 시동을 걸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마침 회항보고를 위해 장퉁신이 리즈룽의 집에 와 있던 참이라 리즈룽은 장퉁신의 말을 인용하여 기적 연돌이 고장나 수리하느라 시동이 걸려 있다고 대답했다. 3월 20일로 넘어가는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장제스는 시멘트 공장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사실상 장제스의 친위부대인 제1군과 [[우톄청]]의 공안 병력을 동원해서 기차역과 중앙은행을 포위했으며 소련 고문들의 집을 봉쇄했다. 장제스는 [[주페이더]]에게 자신에게 동참할 것을 요청했지만 [[주페이더]]는 이를 따르지 않고 탄옌카이와 이 일을 상의하러 갔다. 새벽 3시, 왕바이링이 지휘하는 20사단 병력이 리즈룽을 체포하여 20사단 본부로 압송했다. 리즈룽은 어우양거와 어우양중이 공모하여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제스의 부하들에 의해 [[중산(해방함)|중산함]]도 점거되었다. 파공위원회 총본부가 급습당해 1천명의 규찰대의 무장이 해제되었으며 저우언라이를 비롯하여 국민당과 국민혁명군 내부의 공산당원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다. 소련 고문들은 자택이 포위되고 위병들이 무장해제당한 것에 대해 항의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키산카는 급히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수취인 부재라는 이유로 돌아왔다. 이른바 3.20 사건, 3.20 정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